[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문화적·관념적 식민지화는 창조주 하느님께 대한 신성모독”


“문화적이고 관념적인 식민지화는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며, 모든 것을 획일화시키고, 마침내 믿는 이들마저 박해하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월 21일 화요일 오전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봉헌한 아침미사 강론에서, 제1독서(2마카 6,18-31)의 ‘엘아자르의 순교’에 초점을 맞춰 이같이 강조했다.

교황은 세 가지 기본적인 종류의 박해가 있다고 설명했다. 먼저, 단순히 종교적인 박해가 있다. 그 다음으로는 정치-종교적 박해가 있는데, 예컨대 “30년 전쟁” 혹은 “바르톨로메오 축일 사건” 등 종교적 전쟁이나 정치적 전쟁들이다. 세 번째 형태의 박해는 순수하게 “문화적인 박해”다. 교황은 “완전히 새롭게 만드는, 한 민족의 전통, 역사, 종교까지 말살시키는 새로운 문화”가 대두될 때가 문화적인 박해라고 말했다. 이러한 박해의 마지막 형태는 하느님께 대한 신의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은, 엘아자르가 당했던 박해다.

교황은 이 문화적인 박해 이야기가 전날 전례부터 시작됐다는 데 주목했다. 백성들 중 일부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의 권력과 찬란한 아름다움을 보면서, 현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계약을 맺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에게 나아갔으며, “그는 그들에게 이민족들의 규정을 따라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1마카 1,13). 교황은 여기서 어떤 관념들이나 신들이 아니라, ‘규정’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주님의 율법 테두리 안에서 성장했던 이 백성들은 새로운 문화와 모든 것, 곧 “문화, 종교, 율법”을 말살시키는 “새로운 제도”가 들어오도록 했다. 교황은 “완전히 새로운 것” 혹은 “현대적인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두들 그렇게 행하고 다른 것을 선택할 자유가 없는, “유일한 관습”을 부여하는 진정한 관념적 식민지화라고 강조했다. 백성들 중 일부는 이러한 식민지화를 좋은 일로 여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지내려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전통을 없애버렸으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성의 “참된 전통”을 보호하기 위해, 훌륭한 인품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던 엘아자르가 항거한 것처럼, 저항운동이 태동했다. 마카베오서는 이러한 순교자들, 이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관념적인 식민지화에 의해 시작된 박해는 항상 이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곧, 파괴하고, “모든 것을 획일화시키며,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전날 독서에서 시작해, 교황이 주안점을 두고 있는 핵심 단어는 바로 “악의 뿌리”, 곧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였다. 그는 하느님의 백성 안에 “새롭고, 이교적이며, 세속적인” 풍습을 “권력을 통해” 도입시키고 성장시키려 했던 악의 뿌리였다.

“이것이 믿는 이들까지 박해하게 되는 문화적 식민지화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비근한 사례를 보기 위해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지난 세기의 대량학살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었음을 생각해봅시다. ‘모두 똑같은 민족이었기에, 이 순수한 혈통을 갖지 않은 자들은 모두 바깥으로 내몰렸으며, 이 사람들은 (처단됐습니다)’ (...)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획일화는, 서로 다른 차이를 위한 자리가 없고,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리도 없으며, 하느님을 위한 자리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악의 뿌리입니다. 관념적인 악의 뿌리에서 생겨난 이러한 문화적 식민지화 앞에서, 엘아자르는 스스로 뿌리가 됐습니다.”

사실 엘아자르는 “하느님과 율법에 대한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미래를 위해 뿌리가 되는” 고결한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기꺼이 죽는다. 그러므로 이 관념적이고 문화적인 식민지화를 일으키는 악의 뿌리 앞에, “미래를 성장시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또 다른 뿌리”가 있다.  

안티오코스의 왕국으로부터 도래한 것은 새로운 문화였다. 새로운 것이라고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의 새로움이었던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봐도 충분히 입증되지만, 교황은 이를 잘 분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새로운 것을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새로움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하느님의 뿌리로부터 오는 주님의 새로움입니까? 아니면 이 새로움이 악의 뿌리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전에는 물론 죄였습니다. 어린이들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럴 수 있고, 큰 문제도 없습니다. 이것이 악한 새로움입니다. 옛날에는 차이가 뚜렷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던 것처럼, 피조물이 서로를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약간 현대화됐으며, (...) 다들 그렇게 행하고 (...) 알다시피 (...) 모든 게 크게 차이가 나지 않고 (...) 같이 섞여버립니다. (이것이 악의 뿌리입니다.)”

그 대신에, 하느님의 새로움은 “절충”이 아니라, 성장시키고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다.

“관념적이고 문화적인 식민지화는 단순히 현재를 바라보거나, 과거를 부정하면서 미래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순간에 살고, 멀리 내다보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약속해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두를 획일화시키고 차이를 없애버립니다. 이런 태도를 통해 창조주 하느님을 거슬러 신성모독의 가장 추악한 죄를 범하게 하고, 계속 저지르고 있습니다. 관념적이고 문화적인 식민지화가 올 때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셨던 피조물을 (마음대로) 바꾸고 싶어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창조주 하느님을 거슬러 죄를 짓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통해 수없이 발생했던 이런 사건에 반대하는 유일한 처방은 증거, 곧 순교입니다.”

사실, 엘아자르는 자신의 본보기를 통해 귀감을 남긴다고 생각하면서 목숨을 바쳐 증거했다. “나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물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겠지만, 나의 증거는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이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엘아자르는 돈이나 다른 것을 남기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했고, “자신의 증거를 유산으로” 남기려고 생각했다. 그 증거는 “젊은이들에게 풍성한 약속이” 될 것이다.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2마카 6,28). 그래서 그는 다른 이들을 위해 생명을 내어주는 뿌리가 된다. 교황은 그의 모범이 “우리에게 제시된 문화적이고 영성적인 식민지화 앞에서, 어쩌면 혼란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를 도와주기를 바란다”며 강론을 마쳤다.

 








All the contents on this site are copyrighted ©.